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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 caramba
1997년 본문
1997.1.23 재계 자산순위 14위인 한보철강이 부도났습니다. 부도당시 한보철강은 은행권 3조2,648억원, 제2금융권과 사채 발행까지 합쳐 5조원이 넘는 대출금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1997년 시작과 함께 다가온 대기업의 부도사태로 온국민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앞으로 불행의 전주곡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1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보철강은 전세계에서 상용화 되지 않은 신기술을 무리하게 도입한 전기고로를 사용하여 철강 업계 2위를 노리는 회사였습니다. 제철소가 있던 당진에는 "삽자루만 들고 있어도 하루 10만원은 받는다."라는 말이 유행어로 나돌 정도로 공장건설 인력 수요가 넘쳐나는 곳으로 당진군은 호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한보철강 부도 이후 현대제철이 인수하는 2004년 10월이 오기까지 당진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습니다.
1997.3.18 삼미특수강으로 유명한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났습니다. 당시 재계 26위의 기업이었고, 기계공업과 해운 건설업 등에서 두각을 보이며 재계 순위 17위에 까지 올랐던 기업입니다. 대기업의 부도는 필연적으로 수백 수천개에 이르는 하청업체에까지 연쇄도산 사태를 불러오기 때문에 일련의 대기업의 잇단 부도는 수많은 실업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삼미그룹의 부도는 삼미특수강과 연결되있는 100여개의 하청업체들의 부도로 이어지게됩니다.
2003년 이후 특수강분야로 그룹의 역량을 집중 재편하여 기존의 방만한 운영에서 탈피. 해외영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1997.4.21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류업체로 널리 알려진 진로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금난을 겪게 됩니다.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부는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가 개입해 진로의 부도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 제2금융권의 유동성을 압박하여 다른 기업의 부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국내 은행들은 1조 4659억원어치의 채권을 1261억원에 한국자산관리공사에 넘겼고, 자산관리공사는 이를 다시 2742억원에 골드만삭스 등 주로 외국계 자본에 되팔았습니다.
당시 음식점마다 '진로를 살리자'는 문구가 나붙고, 채권단과 정부는 진로를 구하는데 힘을 모으는 등 "진로 살리기 캠페인"이 벌어졌으며 소주를 마실때 선택은 무조건 진로를 선택하는등 일반 국민들의 애국심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부도는 막을 수 없었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하이트맥주가 3조2천억원에 인수하였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여기서 300%가 넘는 수익률을 남기고 진로를 되팔았습니다.
1997.5.30 우성, 삼익, 건영 공영에 이어 주택 건설 업체인 한신 공영이 1조 천4백억원의 빚과 부채비율은 598%에 제2금융권의 급격한 자금 회수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종업원은 1,900여명에 이르며 지난 1950년 출범한 이래 신반포 한신타운 등 전국에 18만 가구가 넘는 아파트를 공급해온 건설 1세대로 끕히는 아파트 건설 명문이었습니다.
2004년 역시 1997년 사라진 건설사인 우성건설의 자회사격인 협승토건을 주체로한 코암C&C컨소시엄이 4,000억원으로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조원이 넘는 부채는 2008년 현재 1,978억원으로 개선된 상태입니다.
1997.7.15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났습니다.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로 구성된 기아그룹은 총 자산 7조4,246억원, 총 부채 12조 8,762 억원, 순자산 약 -5조 4,516억원으로 채권기관이 약 2조 5천 억원을 출자전환하여 현대자동차는 약1조 1,780억원에 기아자동차의 주식 51%를 인수하였습니다. 현대와 기아 대우 등이 복점체제로 시장 점유율을 나누고 있었지만 기아차 인수 이후 사실상 국내 자동차 시장은 현대 독주체제로 굳어지게 됩니다. 이후 상당히 국내 자동차 시장의 가격은 많이 올랐던게 사실입니다.
기아차 부도와 가동률 하락에 따른 희망퇴직 및 정리해고제 시행으로, 부품을 제외한 완성차 부분에서만 3만명 이상이 이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97년 7월 기아차 부도 이후 98년 10월까지 1차 부품업체의 15%에 해당하는 204개의 부품업체가 부도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10대 그룹의 부도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과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삼성이 적극적으로 인수하려는 과정에서 자기꾀에 넘어가 인수에 실패한 일이나 미국의 포드사가 인수 경쟁자로 나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97.10.15 한때 1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매출 1조원에 달하던 쌍방울그룹은 90년 12월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무주리조트를 개장했습니다. 그런데 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한국 개최가 확정된 93년부터 대규모 시설투자를 벌이면서 자금난이 시작됐습니다. 쌍방울이 무주리조트에 투자한 돈은 6,500억원, 이중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관련 투자비가 3,800억원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쌍방울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2,870억원을 차입해 부실의 나락으로 빨려 들어간것입니다.
한때 마이클 잭슨 등이 무주리조트를 인수를 추진했으나 급박해진 국내정세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2002년 대한전선이 1,473억원을 투자해 무주리조트를 전격 인수하였고 이후 쌍방울은 대한전선의 자회사로 편입되게 됩니다.
1997.10.24 열흘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합니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 → A+, 단기 : A1+ → A1로 하향조정하게 됩니다.
외환위기전에는 일개 투자회사의 신용등급평가는 안중에도 없었던 우리나라 정부였지만 일반 국민들까지 한동안 국가 신용등급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시절이 시작되었고 이 습관은 아직까지도 신경쓰이는 항목이 되어버리게 된 오늘날입니다.
1997.10.27 연이어 주식값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이 발생되고,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괴가 우려되는 사태가 빚어지게 됩니다. 아직까지는 환율는 큰 변동이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1달러는 800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절이라 900원대로 급격히 돌입하는 모습은 불안감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합니다.
1997.10.28 결국 하루만에 종합주가지수 495.28로 마감되 증시 붕괴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증시는 두달사이에 200포인트 하락하였고 나흘 사이에 100포인트가 빠지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날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식 시장의 흐름을 보면 심각했던 이 당시보다 주식시장은 더욱 취약해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아시아 금융시장은 해지펀드의 공격을 받고 있었지만 미국은 장기 불황에서 서서히 벗어나 최고의 호황기로 접어드는 단계였습니다. 따라서 아시아 시장에서의 충격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금융시장 위기는 시작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시장 충격으로 다가올것이라 예상되는바 향후 전망이 불확실성에 쌓여있다고 하겠습니다.
1997.10.30 외환시장은 개장과 동시에 984원까지 치솟았으나 정부의 시장개입으로 950원까지 급락하였습니다. 하루 등락폭은 무려 34원70전. 이 하루동안 얼마나 많은 달러를 쏟아 부었을지 외환보유고를 생각하지 않고 근시안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이 10여년이 지난오늘 왜이리 익숙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환율억제대책을 발표하는데, 단순 보유를 전면 금지합니다. 장농에 있는 달러를 꺼내는 캠패인을 집권당에서 실시하려고 하고 있는 오늘 역사는 반복되는가 봅니다.
1997.10.31 연일 해드라인 뉴스는 환율의 종가를 알려주는게 일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환율이 폭등함에 따라 11월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기름을 넣으려는 자동차들로 주유소마다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유가인상분은 수시로 가격에 적용하기 때문에 신경이 무뎌진걸까요? 주유소에 길게 늘어선 모습을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것 같습니다. 이날 주가는 92년 이후 최저치인 470.79로 마감되었습니다.
1997.11.1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에서 패배한것이 이날 머릿기사로 올라왔습니다. 재계 24위의 해태그룹이 30대 그룹 가운데 다섯 번째로 부도난것은 이제 큰 뉴스꺼리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날 1백96억원을 결제하지못해 부도처리 되고 기업은 분해되어 화의신청과 법정관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자 15개의 계열사중 해태상사와 해태타이거즈만 남기고 그룹이 해체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개의 계열사는 대부분 파산하였습니다.
당시 업계4위였던 크라운제과도 1998년 부도를 맞았지만 기사회생하여 덩치가 2배가 넘는업계 2위인 해태제과를 2005년 인수하여 크라운-해태제과로 매출액 1조5천의 업계 2위로 오리온을 제치고 선두 롯데제과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1997.11.4 재계 25위인 뉴코아가 부도났습니다. 1997년 한해동안 30위권 내의 대기업중 무려 6개의 기업이 부도처리 된것입니다. 9월까지 쓰러진 기업은 11,067개로 하루 평균 40개가 넘었습니다. 또 부도 금액은 9월까지 16조 천억 원이나 되고 연말까지는 20조가 넘을 것으로 보고있었습니다. 30대 기업들이 금융권 부채를 조단위로 안고 경영을 해왔다는 사실이 당시 얼마나 방만하고 외형만을 키우는데 급급하여 허세를 부리는데 열중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IMF구제금융이후 이런 기업문화는 사라졌지만 그 댓가는 너무나도 가혹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1997.11.7 개발도상국의 모범이라며 한껏 추켜세우며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던 외국 언론들이 금융시장위기가 오고 있다며 한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연일 주식을 팔아치웠고 이날 38.24포인트가 하락하고 하락률은 6.9%에 달하며 하락폭과 하락률을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습니다. 외환시장에서도 979.90전으로 마감되어 환율 1,000원 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1997.11.10 이날은 환율이 1,000원을 넘은 날입니다. 1997년 1월 844원이던 환율은 8월 900원대를 돌파하였고 10월 930원 11월 970원으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원화가치가 연초 대비 18% 하락한 것입니다. 정부는 1,000원을 기점으로 강력한 시장개입을 예고하며 앞으로는 이런 급등세는 없을것이라는 느긋한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외환시장에서 아직도 한국에서 환투기세력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걸 공표해버린 셈입니다. 결국 정부의 강력한 시장개입의지는 외한보유고가 바닥나면서 끝나게 됩니다.
1997.11.17 외국언론은 한국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 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만하더라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뻔뻔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아야할 정부와 정치권은 다가올 대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산하기 급급하여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 해야만 그 나라 국민들은 행복하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1997.11.21 이날은 IMF 신청을 발표하는 날입니다.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도움을 통한 회생절차에 들어가는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경제성장 신화를 가진 나라가 경제주권을 외국인들 손에 맞기고 돈을 빌리는데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월초까지만 해도 외환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강경식 부총리의 당당했던 영상을 쉽게 확인해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1997.12.3 미국 주도로 협상은 신속하게 타결됩니다. 한국은 부족한 외화를 지급받고 국제기구의 체질개선 권고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국내 자본시장의 전면 개방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외국인에게 주식시장 개방은 26%에 불과하였지만 1년 사이에 55%까지 늘리는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주식시장이 초토화된 한국에 너무나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의 국내 토지 취득 자유화, 전면적 M&A 허용, 환율 일일 변동폭 폐지, 단기금융시장 금융기관 발행상품 완전 개방 등 금융시장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도 전에 마치 초식동물만 가득한 동물원에 창살을 모두 제거하고 외국의 첨단 금융기법을 갖춘 육식동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을 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입니다. 1997.12.5 국내 자본시장 전면개방의 충격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당시에는 금융기관은 절대 망하지 않는 산업이라고 생각해왔었지만 금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부도가 났습니다. 어음 2,700억원을 막지 못한 것인데, IMF 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고 국제 자본의 먹이가 된 수많은 은행들은 하나둘씩 주인이 바뀌었고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이 회수율은 아직도 충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 외국계 은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력 감축과 또는 되파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등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 불과 10여년전의 일입니다. 1997.12.6 현대그룹의 계열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라그룹이 2,212억 원을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처리 났습니다. 한라그룹은 알짜기업인 만도기계와 한라시멘트, 한라건설 등의 7개사를 주력회사로 하는 재계 12위의 대기업이었습니다. 매출액만 5조3천억 원으로 조선과 자동차 부품 등을 주력으로 하는 중후장대의 대명사인 회사였지만 부채는 6조4천억 원이었습니다. 이로써 대기업 부도로 금융기관이 떠안게 된 부실 채권이 30조 원을 넘게 됩니다.
이후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 투자컨설팅회사인 한라I&C 등이 옛 한라그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2008년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로 가장 가치가 있어 팔려나갔던 만도기계를 6,515억 원에 다시 인수해 오게 됩니다. 1997.12.10 환율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연초대비 2배가 오른 것입니다. 해외에서 원료를 사와 수출을 통한 성장을 지속해온 한국의 입장에선 이런 말도 안되는 환율 상승폭을 견딜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을 가져오게 되는것이지요. 이때 이후 모든 생필품의 가격 인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300원 500원 하던 과자 아이스크림은 500원 700원씩 당당히 올랐었습니다. 작은 컵라면은 30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IMF가 오기 직전 일본등 저금리인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금리 차이를 노리고 소위 돈놀이를 하였다가 부실채권으로 묶이며 외화 부족의 단초를 제공해왔던 종금사들을 정부에서 극약처방으로 업무 정지를 시키게 됩니다. 이로 시중의 돈줄은 더욱 마르게 됩니다.
1997.12.11 환율이 나을 연속 거래제한폭 까지 폭등하며 환율이 1,700원을 돌파하였습니다. 4분 만에 거래소는 서킷브레이크가 발동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총 외채는 1,200억 달러로 환율이 100원만 올라도 빚은 12조 원씩 불어나는 셈입니다. 참고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발표된 한국의 외한 보유고는 2,300억입니다. 이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30억 달러가 안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97.12.18 대선정국이었지만 1년내내 바람질날 없던 한해였습니다. 결국 국민들은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선택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DJ의 당선은 아시아 민주발전에 큰 획이라며 환영의 입장을 보입니다. 1997.12.23 연일 외화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날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외채는 2천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중 단기 외채가 1,3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IMF의 지원금을 포함한 가용 외화는 185억 달려였고 연말까지 갚아야할 외채는 150억 달러로 그야말로 모라토리엄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율은 2,000원을 코앞에 둔 1,995원에 마감되었고 장중 한 때 2,067원까지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식시장은 연일 하락하며 366.36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외화 부족으로 한국에게 가장 많은 외채를 빌려주었던 나라는 일본이었지만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에 채권을 모두 회수하여 한국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지마자 한일은 해외 각국에 사절을 보내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외국인 투자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날 뉴스는 저도 본 기억이 나는데 특히 '밤잠 설친다'라는 문구가 너무 강렬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 외자를 공급해주기로 해준 나라는 독일이었으며 가장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7.12.24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불리던 이날 예상보다 빠르게 세계은행과 ADB, 그리고 미국정부등으로부터 외화가 속속 입금되었습니다. 이에 외환시장은 진정국면으로 돌아섰고 당장 눈앞에 시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급선무지만, 이제 우리는 비록 강요된 개혁이라도 우리 시장을 활짝 열어놓고 개혁을 통해서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체질개선에 들어갑니다. 2001.8.23 3년 8개월만에 IMF에 잔금 1억 4천억달러를 상환하였습니다. IMF부터 빌린 달러는 195억 달러였습니다. 이로써 한국의 외환위기는 지나갔지만 그동안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비대해진 조직과 부채비율을 줄이는 과정에서 대량감원과 감봉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긴 어둠의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대우그룹 부도와 현대의 공중분해 외환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 등 금융권의 부실채권 문제로 이어지면서 90년대 후반 금융권은 기업들이 남긴 채권을 정리하는데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었습니다. 명예퇴직과 BIS 비율같은 생소한 단어들은 너무도 일상화 되었고 수많은 실직자와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늘날 10여년 전의 어둡고 힘들었던 사실을 궂이 다시 상기시키고자 하는것은 우리 모두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것입니다.
한보철강은 전세계에서 상용화 되지 않은 신기술을 무리하게 도입한 전기고로를 사용하여 철강 업계 2위를 노리는 회사였습니다. 제철소가 있던 당진에는 "삽자루만 들고 있어도 하루 10만원은 받는다."라는 말이 유행어로 나돌 정도로 공장건설 인력 수요가 넘쳐나는 곳으로 당진군은 호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한보철강 부도 이후 현대제철이 인수하는 2004년 10월이 오기까지 당진의 경제 상황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습니다.
1997.3.18 삼미특수강으로 유명한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났습니다. 당시 재계 26위의 기업이었고, 기계공업과 해운 건설업 등에서 두각을 보이며 재계 순위 17위에 까지 올랐던 기업입니다. 대기업의 부도는 필연적으로 수백 수천개에 이르는 하청업체에까지 연쇄도산 사태를 불러오기 때문에 일련의 대기업의 잇단 부도는 수많은 실업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삼미그룹의 부도는 삼미특수강과 연결되있는 100여개의 하청업체들의 부도로 이어지게됩니다.
2003년 이후 특수강분야로 그룹의 역량을 집중 재편하여 기존의 방만한 운영에서 탈피. 해외영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1997.4.21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류업체로 널리 알려진 진로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금난을 겪게 됩니다.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부는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가 개입해 진로의 부도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 제2금융권의 유동성을 압박하여 다른 기업의 부도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국내 은행들은 1조 4659억원어치의 채권을 1261억원에 한국자산관리공사에 넘겼고, 자산관리공사는 이를 다시 2742억원에 골드만삭스 등 주로 외국계 자본에 되팔았습니다.
당시 음식점마다 '진로를 살리자'는 문구가 나붙고, 채권단과 정부는 진로를 구하는데 힘을 모으는 등 "진로 살리기 캠페인"이 벌어졌으며 소주를 마실때 선택은 무조건 진로를 선택하는등 일반 국민들의 애국심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부도는 막을 수 없었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하이트맥주가 3조2천억원에 인수하였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여기서 300%가 넘는 수익률을 남기고 진로를 되팔았습니다.
1997.5.30 우성, 삼익, 건영 공영에 이어 주택 건설 업체인 한신 공영이 1조 천4백억원의 빚과 부채비율은 598%에 제2금융권의 급격한 자금 회수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종업원은 1,900여명에 이르며 지난 1950년 출범한 이래 신반포 한신타운 등 전국에 18만 가구가 넘는 아파트를 공급해온 건설 1세대로 끕히는 아파트 건설 명문이었습니다.
2004년 역시 1997년 사라진 건설사인 우성건설의 자회사격인 협승토건을 주체로한 코암C&C컨소시엄이 4,000억원으로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조원이 넘는 부채는 2008년 현재 1,978억원으로 개선된 상태입니다.
1997.7.15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났습니다.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로 구성된 기아그룹은 총 자산 7조4,246억원, 총 부채 12조 8,762 억원, 순자산 약 -5조 4,516억원으로 채권기관이 약 2조 5천 억원을 출자전환하여 현대자동차는 약1조 1,780억원에 기아자동차의 주식 51%를 인수하였습니다. 현대와 기아 대우 등이 복점체제로 시장 점유율을 나누고 있었지만 기아차 인수 이후 사실상 국내 자동차 시장은 현대 독주체제로 굳어지게 됩니다. 이후 상당히 국내 자동차 시장의 가격은 많이 올랐던게 사실입니다.
기아차 부도와 가동률 하락에 따른 희망퇴직 및 정리해고제 시행으로, 부품을 제외한 완성차 부분에서만 3만명 이상이 이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97년 7월 기아차 부도 이후 98년 10월까지 1차 부품업체의 15%에 해당하는 204개의 부품업체가 부도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10대 그룹의 부도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과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삼성이 적극적으로 인수하려는 과정에서 자기꾀에 넘어가 인수에 실패한 일이나 미국의 포드사가 인수 경쟁자로 나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97.10.15 한때 1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매출 1조원에 달하던 쌍방울그룹은 90년 12월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무주리조트를 개장했습니다. 그런데 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한국 개최가 확정된 93년부터 대규모 시설투자를 벌이면서 자금난이 시작됐습니다. 쌍방울이 무주리조트에 투자한 돈은 6,500억원, 이중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관련 투자비가 3,800억원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쌍방울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2,870억원을 차입해 부실의 나락으로 빨려 들어간것입니다.
한때 마이클 잭슨 등이 무주리조트를 인수를 추진했으나 급박해진 국내정세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2002년 대한전선이 1,473억원을 투자해 무주리조트를 전격 인수하였고 이후 쌍방울은 대한전선의 자회사로 편입되게 됩니다.
1997.10.24 열흘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합니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 → A+, 단기 : A1+ → A1로 하향조정하게 됩니다.
외환위기전에는 일개 투자회사의 신용등급평가는 안중에도 없었던 우리나라 정부였지만 일반 국민들까지 한동안 국가 신용등급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시절이 시작되었고 이 습관은 아직까지도 신경쓰이는 항목이 되어버리게 된 오늘날입니다.
1997.10.27 연이어 주식값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이 발생되고,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괴가 우려되는 사태가 빚어지게 됩니다. 아직까지는 환율는 큰 변동이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1달러는 800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절이라 900원대로 급격히 돌입하는 모습은 불안감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합니다.
1997.10.28 결국 하루만에 종합주가지수 495.28로 마감되 증시 붕괴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증시는 두달사이에 200포인트 하락하였고 나흘 사이에 100포인트가 빠지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날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주식 시장의 흐름을 보면 심각했던 이 당시보다 주식시장은 더욱 취약해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아시아 금융시장은 해지펀드의 공격을 받고 있었지만 미국은 장기 불황에서 서서히 벗어나 최고의 호황기로 접어드는 단계였습니다. 따라서 아시아 시장에서의 충격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금융시장 위기는 시작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시장 충격으로 다가올것이라 예상되는바 향후 전망이 불확실성에 쌓여있다고 하겠습니다.
1997.10.30 외환시장은 개장과 동시에 984원까지 치솟았으나 정부의 시장개입으로 950원까지 급락하였습니다. 하루 등락폭은 무려 34원70전. 이 하루동안 얼마나 많은 달러를 쏟아 부었을지 외환보유고를 생각하지 않고 근시안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이 10여년이 지난오늘 왜이리 익숙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환율억제대책을 발표하는데, 단순 보유를 전면 금지합니다. 장농에 있는 달러를 꺼내는 캠패인을 집권당에서 실시하려고 하고 있는 오늘 역사는 반복되는가 봅니다.
1997.10.31 연일 해드라인 뉴스는 환율의 종가를 알려주는게 일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환율이 폭등함에 따라 11월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기름을 넣으려는 자동차들로 주유소마다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유가인상분은 수시로 가격에 적용하기 때문에 신경이 무뎌진걸까요? 주유소에 길게 늘어선 모습을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것 같습니다. 이날 주가는 92년 이후 최저치인 470.79로 마감되었습니다.
1997.11.1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에서 패배한것이 이날 머릿기사로 올라왔습니다. 재계 24위의 해태그룹이 30대 그룹 가운데 다섯 번째로 부도난것은 이제 큰 뉴스꺼리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날 1백96억원을 결제하지못해 부도처리 되고 기업은 분해되어 화의신청과 법정관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자 15개의 계열사중 해태상사와 해태타이거즈만 남기고 그룹이 해체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개의 계열사는 대부분 파산하였습니다.
당시 업계4위였던 크라운제과도 1998년 부도를 맞았지만 기사회생하여 덩치가 2배가 넘는업계 2위인 해태제과를 2005년 인수하여 크라운-해태제과로 매출액 1조5천의 업계 2위로 오리온을 제치고 선두 롯데제과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1997.11.4 재계 25위인 뉴코아가 부도났습니다. 1997년 한해동안 30위권 내의 대기업중 무려 6개의 기업이 부도처리 된것입니다. 9월까지 쓰러진 기업은 11,067개로 하루 평균 40개가 넘었습니다. 또 부도 금액은 9월까지 16조 천억 원이나 되고 연말까지는 20조가 넘을 것으로 보고있었습니다. 30대 기업들이 금융권 부채를 조단위로 안고 경영을 해왔다는 사실이 당시 얼마나 방만하고 외형만을 키우는데 급급하여 허세를 부리는데 열중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IMF구제금융이후 이런 기업문화는 사라졌지만 그 댓가는 너무나도 가혹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1997.11.7 개발도상국의 모범이라며 한껏 추켜세우며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던 외국 언론들이 금융시장위기가 오고 있다며 한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연일 주식을 팔아치웠고 이날 38.24포인트가 하락하고 하락률은 6.9%에 달하며 하락폭과 하락률을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습니다. 외환시장에서도 979.90전으로 마감되어 환율 1,000원 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1997.11.10 이날은 환율이 1,000원을 넘은 날입니다. 1997년 1월 844원이던 환율은 8월 900원대를 돌파하였고 10월 930원 11월 970원으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원화가치가 연초 대비 18% 하락한 것입니다. 정부는 1,000원을 기점으로 강력한 시장개입을 예고하며 앞으로는 이런 급등세는 없을것이라는 느긋한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외환시장에서 아직도 한국에서 환투기세력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걸 공표해버린 셈입니다. 결국 정부의 강력한 시장개입의지는 외한보유고가 바닥나면서 끝나게 됩니다.
1997.11.17 외국언론은 한국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 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만하더라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뻔뻔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아야할 정부와 정치권은 다가올 대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산하기 급급하여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 해야만 그 나라 국민들은 행복하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1997.11.21 이날은 IMF 신청을 발표하는 날입니다.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도움을 통한 회생절차에 들어가는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경제성장 신화를 가진 나라가 경제주권을 외국인들 손에 맞기고 돈을 빌리는데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월초까지만 해도 외환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강경식 부총리의 당당했던 영상을 쉽게 확인해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1997.12.3 미국 주도로 협상은 신속하게 타결됩니다. 한국은 부족한 외화를 지급받고 국제기구의 체질개선 권고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국내 자본시장의 전면 개방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외국인에게 주식시장 개방은 26%에 불과하였지만 1년 사이에 55%까지 늘리는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주식시장이 초토화된 한국에 너무나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의 국내 토지 취득 자유화, 전면적 M&A 허용, 환율 일일 변동폭 폐지, 단기금융시장 금융기관 발행상품 완전 개방 등 금융시장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도 전에 마치 초식동물만 가득한 동물원에 창살을 모두 제거하고 외국의 첨단 금융기법을 갖춘 육식동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을 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입니다. 1997.12.5 국내 자본시장 전면개방의 충격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당시에는 금융기관은 절대 망하지 않는 산업이라고 생각해왔었지만 금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부도가 났습니다. 어음 2,700억원을 막지 못한 것인데, IMF 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고 국제 자본의 먹이가 된 수많은 은행들은 하나둘씩 주인이 바뀌었고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이 회수율은 아직도 충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 외국계 은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력 감축과 또는 되파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등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 불과 10여년전의 일입니다. 1997.12.6 현대그룹의 계열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라그룹이 2,212억 원을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처리 났습니다. 한라그룹은 알짜기업인 만도기계와 한라시멘트, 한라건설 등의 7개사를 주력회사로 하는 재계 12위의 대기업이었습니다. 매출액만 5조3천억 원으로 조선과 자동차 부품 등을 주력으로 하는 중후장대의 대명사인 회사였지만 부채는 6조4천억 원이었습니다. 이로써 대기업 부도로 금융기관이 떠안게 된 부실 채권이 30조 원을 넘게 됩니다.
이후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 투자컨설팅회사인 한라I&C 등이 옛 한라그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2008년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로 가장 가치가 있어 팔려나갔던 만도기계를 6,515억 원에 다시 인수해 오게 됩니다. 1997.12.10 환율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연초대비 2배가 오른 것입니다. 해외에서 원료를 사와 수출을 통한 성장을 지속해온 한국의 입장에선 이런 말도 안되는 환율 상승폭을 견딜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을 가져오게 되는것이지요. 이때 이후 모든 생필품의 가격 인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300원 500원 하던 과자 아이스크림은 500원 700원씩 당당히 올랐었습니다. 작은 컵라면은 30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IMF가 오기 직전 일본등 저금리인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금리 차이를 노리고 소위 돈놀이를 하였다가 부실채권으로 묶이며 외화 부족의 단초를 제공해왔던 종금사들을 정부에서 극약처방으로 업무 정지를 시키게 됩니다. 이로 시중의 돈줄은 더욱 마르게 됩니다.
1997.12.11 환율이 나을 연속 거래제한폭 까지 폭등하며 환율이 1,700원을 돌파하였습니다. 4분 만에 거래소는 서킷브레이크가 발동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총 외채는 1,200억 달러로 환율이 100원만 올라도 빚은 12조 원씩 불어나는 셈입니다. 참고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발표된 한국의 외한 보유고는 2,300억입니다. 이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30억 달러가 안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97.12.18 대선정국이었지만 1년내내 바람질날 없던 한해였습니다. 결국 국민들은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선택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DJ의 당선은 아시아 민주발전에 큰 획이라며 환영의 입장을 보입니다. 1997.12.23 연일 외화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날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외채는 2천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중 단기 외채가 1,3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IMF의 지원금을 포함한 가용 외화는 185억 달려였고 연말까지 갚아야할 외채는 150억 달러로 그야말로 모라토리엄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율은 2,000원을 코앞에 둔 1,995원에 마감되었고 장중 한 때 2,067원까지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식시장은 연일 하락하며 366.36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외화 부족으로 한국에게 가장 많은 외채를 빌려주었던 나라는 일본이었지만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에 채권을 모두 회수하여 한국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지마자 한일은 해외 각국에 사절을 보내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외국인 투자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날 뉴스는 저도 본 기억이 나는데 특히 '밤잠 설친다'라는 문구가 너무 강렬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 외자를 공급해주기로 해준 나라는 독일이었으며 가장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7.12.24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불리던 이날 예상보다 빠르게 세계은행과 ADB, 그리고 미국정부등으로부터 외화가 속속 입금되었습니다. 이에 외환시장은 진정국면으로 돌아섰고 당장 눈앞에 시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급선무지만, 이제 우리는 비록 강요된 개혁이라도 우리 시장을 활짝 열어놓고 개혁을 통해서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체질개선에 들어갑니다. 2001.8.23 3년 8개월만에 IMF에 잔금 1억 4천억달러를 상환하였습니다. IMF부터 빌린 달러는 195억 달러였습니다. 이로써 한국의 외환위기는 지나갔지만 그동안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비대해진 조직과 부채비율을 줄이는 과정에서 대량감원과 감봉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긴 어둠의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대우그룹 부도와 현대의 공중분해 외환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 등 금융권의 부실채권 문제로 이어지면서 90년대 후반 금융권은 기업들이 남긴 채권을 정리하는데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었습니다. 명예퇴직과 BIS 비율같은 생소한 단어들은 너무도 일상화 되었고 수많은 실직자와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늘날 10여년 전의 어둡고 힘들었던 사실을 궂이 다시 상기시키고자 하는것은 우리 모두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것입니다.